기사제목 영국 로히터통신 종군기자의 과거 역사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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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로히터통신 종군기자의 과거 역사 회고담

한국유엔참전국협회 지갑종회장 인터뷰
기사입력 2020.02.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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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영국 로히터통신 종군기자요 대한민국 제11,12대 국회의원인 지갑종 한국유엔참전국협회 회장의 인터뷰 동영상이다. 지갑종 회장은 지응현할아버지의 환갑때 태어났기 때문에 갑종이라는이름을얻었다. 기자로서 경험한 한국전쟁에 대한이야기와 참전국 군인들에대한 보은 활동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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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 회장 인터뷰(, 6.25 한국전쟁 당시 영국 로히터통신 종군기자. 대한민국 제11, 12대 국회의원. 충주지씨 중앙종친회 회장 역임. 충주지씨 충성군파 제39)]

 

지용길 사무국장-회장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종친회를 떠올릴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말씀해주시지요.

지갑종 회장-나는 60년대 초 서울역 앞에서 방 한 칸 얻어가지고 시작했던 것을 자꾸 연상하게 되는데. 그리고 우리 종친들이 비스니스에 대해서는 약해. 그래서 봉사할지라도 자기 것을 챙기지를 못했기 때문에 어려웠는데.

지용길 사무국장-어려웠던 시절이 추억에 남아 있네요.

지갑종 회장-이제 내가 1112대 국회의원을 하게 되니까 이제 좀 회장을 맡아서 심부름을 해달라고 해. 그런데 내가 회장이 되어 일하려면 자금도 좀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어렵지 않느냐 했는데. 그래도 우선 종친회를 궤도에 올려놓고라도 손을 떼어야겠다. 생각해서 열심히 해 봤단 말이야. 그런데 어려워.

지용길 사무국장-그렇게 나서주셨네요.

지갑종 회장-그래가지고 7년 했나 8년 했나 그래서 끝났는데. 그때는 거기 있다가 또 저쪽 강남 쪽으로 갔다가 강북 쪽으로도 가고 보따리 들고 돌아다닐 정도로 어려웠는데.

지용길 사무국장-종암동 쪽으로도 갔었지요?

지갑종 회장-그런데다 또 내분이 되어가지고. 재산권의 문제가 되니까. 그래서 우리 파 다 니파다 이런 상황도 또 오고. 지가는 하나면 하나로 가는 거지. 파가 뭐가 있냐 이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까지 온 거지.

지용길 사무국장-.

지갑종 회장-그러고 보니까 우선 회의를 한다고 해도 모여지지가 않아.

지용길 사무국장-왜 모임이 어려웠나요?

지갑종 회장-모임이 어려웠던 이유는 먼저 간단히 얘기하면 돈 없어서

지용길 사무국장-.

지갑종 회장-그래. 내가 과거에 학생 때부터 단체를 운영해보고 참전국협회도 해보고 그러니까 이제 그 군중심리를 잡는 요령은 있어서.

지용길 사무국장-.

지갑종 회장-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없었어. 각 집에. 그래서 회의 끝나고 나서 소위 추첨을 해가지고 텔레비전을 하나 준다고 하니까 회의에 온 사람들이 가지를 못해. 이런 심리적인 것도 써가지고 어렵게 넘어와서 나중에는 역시 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종친회 가족화를 이루는 것이었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활성화시킨다는 거지요?

지갑종 회장-활성화는 결국 자주 만나야 하는데 만나는 것이 강남 저쪽으로 가서 하게 되니까 자연히 어렵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앞으로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그것을 미끼로 해서 같이 좀 만나고. 일단 만나야 가족이지.

지용길 사무국장-, 맞습니다.

지갑종 회장-만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야. 옛날부터 이웃사촌이라는 것이 있어. 가까운 사람들이 친척처럼 가까운 거야. 서로 돕고 빈 말이라도 서로 왔다 갔다 해야 얘기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용길 사무국장-만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지갑종 회장-, 이제 내가 오늘 20202월 중순에 지금 종친회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기적으로 맞지가 않아.

지용길 사무국장-왜 그런가요?

지갑종 회장-그 이유는 연도가 지나서가 아니라 지금 유행성 감기 때문에 서로 만나기도 꺼려하고 또 서로 몸조심하고 있는 판국에 모임을 가질 수도 없고 또 언제 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전망도 보이지 않고.

지용길 사무국장-맞습니다. 상황이 어렵네요.

지갑종 회장-그런데 다행히 우리 지 씨는 아직 걸렸다는 소리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고비가 지나서 아마 봄철 날씨가 따스워질 때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어서.

지용길 사무국장-그렇습니다.

지갑종 회장-꼭 단체 모임이라 하면 숫자적으로 몇 십 명 백 명 모이는 것을 모임이라고 하지 말고 몇 사람이라도.

지용길 사무국장-기회를 많이 만들어

지갑종 회장-만나서 좋은 얘기를 나누면 그것이 확산된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렇네요.

지갑종 회장-이 사회도 어느 회사도 학교도 공부하는 아이 몇 명 있고 나머지는 그냥 학교 다니는 거야. 또 남의 회사 월급 받아먹고 하루 종이 저녁에 집에 가서 대포나 한자 먹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고.

지용길 사무국장-열심히 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지갑종 회장-그러니까 공부한 사람은 몇 사람이라는 거야. 나머지는 아니다 이거지. 우리 종친도 많은 사람이 모여야 일이 되는 게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자. 이 마음을 갖자는 얘기야.

지용길 사무국장-예 무슨 말씀인지 우리에게 지혜롭게 뭐 큰 거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은 주어진 조건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몇 사람이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런 귀한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지갑종 회장-그래 뭐든지 큰 사람이. 소위 지도자. 앞장서서 가는 사람이 잘 해야지. 전체가 다 앞장설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남이 잘된 것을 시기하지 말고 돕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구.

지용길 사무국장-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제는 가족들 소개 좀 해주시지요. 자녀들이랑 이렇게

지갑종 회장-뭐 나야. 결혼도 늦게 했지만은 금년이 내가 결혼 60주년이다.

지용길 사무국장-~ 축하드립니다.

지갑종 회장-결혼 60주년을 한 사람이 드물어. 그동안에 가정이 불화가 있거나 건강상으로 또 타계한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혼자된 사람도 있고 이래서 숫자가 많지를 않아. 그리고 옛날 같으면 환갑 그러면 상당히 장수했다고 하지만.

지용길 사무국장-그렇지요.

지갑종 회장-지금 어디 가서 환갑이라고 하면은 지금 웃기는 얘기란 말이야. 지금 내가 94살이 되어 가는데. 그래도 다행히 결혼해서 60년을 살았고 또 아들 둘에 딸 하나 손자는 남자가 다섯에 여자가 둘. 그러니까 며느리 사위까지 해서 전체 직계가족이 15명이야.

지용길 사무국장-.

지갑종 회장-그런데 그 중에 한 가족은 캐나다에 가 있고 하나는 중국 가서 지금 상해에 쉘 회사에 고문으로 있고 하나는 국제여행사 관계로 해서 일을 보러 서울에 왔다 갔다 하고 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위가 지역 우리 교포들을 위한 학원을 경영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 집은 완전히 흩어져 있어

지용길 사무국장-국제화되어 있네요.

지갑종 회장-그래서 국제호텔이라고 해.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놈들이 있어서. 그리고 내가 큰 돈 벌어서 준 것은 없지만은 명예는 줄 수 있다.

지용길 사무국장-그것이 좋은 유산이지요.

지갑종 회장-좋든 나쁘든 내가 해방 후에 미국 군정 때 미국사람들에게 영어를 배운다고 다니던 것이 국방부야 그러니까 해방 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미군부대 사령관을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그 후로 통이부장을 했으니까 국방경비대. 국방장관을 한 거야. 미국 군정 때. 대한민국 수립 전에. 그 집에서 내가 2년 반을 살았어.

지용길 사무국장-미국인들과 함께 사셨네요.

지갑종 회장-나는 안 간다. 서울에 우리 집이 있으니까 가끔 가겠다. 광주가 집이니까? 그랬더니 간곡히 자기 집에 와 있으라는 거야. 그게 뭔고 허니. 그 때는 어떤 놈이 빨갱이인지 모르니까. 이미 아는 사람이 기특하게 생각해서 우리 집에 있어다오 그러는 거야. 아는 사람이 영어배울 겸 그 집에 있으라고.

지용길 사무국장-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였네요.

지갑종 회장-나는 하우스보이 소리 들을까 봐 안 가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학교 다니면서 저녁에는 같이 미국도 배우고 그러겠다. 그래가지고 2년 반을 살았으니

지용길 사무국장-거기서 꽤 오래 사셨네요.

지갑종 회장-그 동안에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들어오라고 야단법석을 했는데 만약에 갔더라면 박정희 대통령하고 동기생인데. 나이가 그 때는 스무 살이니까.

지용길 사무국장-잘 아는 사이였나 봐요.

지갑종 회장-다른 사람은 학병을 갔다 온다거나 지원병을 갔다 온다거나 만주나 중국에서 군대를 이수한 사람들이 와서 하니까 나보다는 전부 대여섯 살 위야. 그러니 내가 거기 껴서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나는 연희대학교 졸업하겠다. 그래서 졸업하고 만 거지.

지용길 사무국장-생각을 잘 하셨네요.

지갑종 회장-그런데 6.25가 나니까 소위 중위밖에 안 되던 사람들이 사단장 군단장이 된 사람들이 너 살았구나. 나하고 같이 있자. 그래서 군대를 아니까. 영국 로히터 통신에서 너 군인들을 알고 하니 도와 달라. 영어도 조금 하고 그러니까 종군기자가 된 거야. 그래서 기자생활을 62년까지 하고.

지용길 사무국장-로히터통신 종군기자가 된 계기였네요.

지갑종 회장-그동안에 참전 16개국을 어디 있는가? 지도에 보니까 6대주에 있어. 그래서 모두 다 갔다 왔단 말이야.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각 나라에서 우리 연락사무실을 서울에 두자고 했어. 나는 군인이니까 서울에 재향군인회가 있지 않느냐? 그랬더니 재향군인회는 한국의 것이고 우리의 유엔군 관계 연락사무실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맞는 말이네요.

지갑종 회장-그래서 만든 것이 한국 유엔 참전국협회야. 오늘날까지 내가 60년을 한 거지. 그리고 각 나라에다가 한국 참전 용사회를 조직 했지.

지용길 사무국장-회장님의 역할이 컸네요.

지갑종 회장-왜냐하면 내가 갔을 때만 해도 휴전 5년 후인데 조직이 안 돼 있어. ? 이제 가서 얼마 안 되가지고 자기 재향군인회에 묻혀있었던 거지. 재향군인회는 내가 감으로 시작된 거야. 한국에서 기자가 왔는데 우리를 보러 왔다. 그래가지고 동네사람들 서로 수소문해서 같이 나와 가지고.

지용길 사무국장-그게 시작이었네요.

지갑종 회장-다행히. 우리가 모교에서 선생님이 오시면 동네에서 나는 몇 회 졸업생이고 몇 회 졸업생 그래서 만나는 것처럼

지용길 사무국장-모임이 되지요.

지갑종 회장-그게 도화선이 돼 가지고 각 참전국 한국 참전용사회가 조직이 되었다가 거야. 그 연락병을 내가 맡아가지고 있다가 이제 내가 회장을 맡은 거지.

지용길 사무국장-지금 여기 사무실이 한국 유엔 참전국협회 사무실이지요?

지갑종 회장-유엔 참전국협회지. 참전국협회를 영어로 하면 korea alliance associance코리아노 얼라이언스 어소시에이션인데. 영어로 하면 미국도 중국도 똑 같아.

지용길 사무국장-혼돈이 생기겠어요.

지갑종 회장-그래서 이것을 우익진영이다. 민주주의다 해가지고 유엔에 허가를 맡아야 하는데 허가를 받지 않았으니 유나이트 네이션(연합국가)이라 하지 않고 말 나오는 대로 UN이라고 했어.

지용길 사무국장-유엔군이었으니까.

지갑종 회장-그래도 유엔에서 문제가 될까 걱정되어 내가 먼저 손을 썼지. 유엔 주재 각국 대사들에게 편지를 했어. 이래 저래서 참전국 연락사무소를 한국에 만들었는데 이름을 유엔참전국협회로 한다.

지용길 사무국장-잘 하셨네요.

지갑종 회장-그랬더니 다들 고맙다고 편지가 오는데 자기들이 먼저 유엔이라고 하지 않고 유나이트 네이션(Unite Nation)이라고 풀 네임으로 썼단 말이야. 나는 동의 받을 의사가 없었으니까. 자기들이 돈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지용길 사무국장-그러니까요.

지갑종 회장-그것도 정일권씨를 국무총리 당시에 회장으로 맡아달라고 그랬더니 야. 앞에다가 유엔이라고 넣자 그러는 거야. 그래서 유엔을 넣은 거야. 오늘날에는 유엔이라고도 하고 유나이트 네이션이라고도 하고 60년을 하니까 기틀이 잡힌 거지.

지용길 사무국장-자연히 정착이 되었네요.

지갑종 회장-내가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유인이라는 것도 참전국이라는 것도 깨져버리고 없어졌을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왜 그런가요?

지갑종 회장-모두 관심도 없고. 지금도 자기나라가 참전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사관 무관으로 와 있어. 대사도 젊어. 그러니 그 때 당시의 참전용사가 다 90대니까 그 아들이 60대란 말이야 참전용사가. 그 아들의 아들 그러니 손자가 30. 이러니 이제 증손자가 왔다 갔다 할 판국이니까. 우리가 임진왜란 얘기하나 6.25 얘기하나 똑같은 얘기가 돼.

지용길 사무국장-그러네요.

지갑종 회장-그렇지만 임신왜란. 그 때 보다도 지금은 통신이 발전되어있고 교통이 발전해서 그 때 얘기를 하고 있고.

지용길 사무국장-시대가 바뀌었기에 가능한거네요.

지갑종 회장-또 그 사람들을 한국에 오게 한 것이 69년도야. 내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내년이면 6.25 10주년이니까 이제 참전용사들도 불러들일 때가 됐습니다.

지용길 사무국장-회장님께서 먼저 제안하셨군요.

지갑종 회장-그러니까 박대통령이 파티에서 만났을 때. 나라에 돈이 있어야지 그래.

지용길 사무국장-돈이 있어야 하니까.

지갑종 회장-물론이지 그때에는. 그래서 돈은 엄려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 연금을 받아서 2년 동안 1020불씩 아끼면 항공편은 자기들이 삽니다. 필리핀에서오고 미국에서 오면 비행기 싹만 해도 차이가 많이 나니까? 우리가 일률적으로 줄 수는 없고 한국에 오면 56일만 저희들이 담당합시다.

지용길 사무국장-그래야지요. 한국이 가난하니까.

지갑종 회장-그런데 한꺼번에 또 몇 백 명 씩 오면 어떻게 할 꺼냐? 그러는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것도 문제가 있네요.

지갑종 회장-그러니까 우리 대사관 무관을 통해서 금년에는 미국은 10명 영국은 5명 호주 3명 이렇게 줄여서.

지용길 사무국장-그렇지요. 한꺼번에 오는 것보다.

지갑종 회장-왜 그러냐? 만약에 온다고 해도 대한민국에 호텔이 없어. 호텔도 없고 교통도 그렇고.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참전국 용사들이 온다고 해서 나는 벌써 이미 67년에 영연방 참전비를 가평에 만들었고. 그 다음에 68년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온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춘천에다가 기념비를 만들었지.

지용길 사무국장-미리 준비를 잘 하셨네요.

지갑종 회장-이 두 개를 다 내 사재를 털어서 만든 거야. 아버지한테 내 이름으로 있던 과수원을 팔아가지고 허락받아가지고 했어.

지용길 사무국장-열의가 대단하셨네요.

지갑종 회장-물론 친구들도 도와주고 했지만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가평에 900평 그 땅을 사는데 기념비 세울 장소를. 평당 3천원이야. 그런데 계약금 27만원이 없어 군청에. 그것도 와이프 계돈 얻어다가 계약해 가지고 나머지 돈도 치렀어. 그러니까 친구들은 얘기하기를 너 미친놈이다. 그랬어.

지용길 사무국장-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요.

지갑종 회장-나는 아니다. 참전용사들이 와서 논두렁에 가서 참배하겠냐? 자기 격전지라고 해서 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겠냐? 여러 가지 고려해서 영 연방국은 가평. 왜 영 연방을 하나씩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네 나라를 묶어서 가평에 한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어려운 가운데서도 준비를 잘 하셨네요.

지갑종 회장-그 이유는 호주에 가니까 기자로 갔지만은 시드니에 가평 스트리트가 있더라고. 우리나라의 강남에 테헤란로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캐나다에 가니까 한국 참전 군 기지 부대 이름이 가평이야. 이렇게 가평이 유명해졌더라구,

지용길 사무국장-회장님께서 유엔참전국협회를 하시는데 저는 이제 교회 목사거든요. 예수소망교회라고 목사인데요. 제 같은 교단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인데요. 새에덴교회 소강석목사님. 그분은 참전 용사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해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일을 하거든요. 아시지요? 소강석목사님.

지갑종 회장-아니.

지용길 사무국장-아 모르세요? 그래서 유엔 참전용사들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행사도 하고 고마움을 표시도 하고 미국으로 가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기회 되면 한 번 소강석목사님을 회장님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갑종 회장-그래. 내가 들었는데 교회에서 참전용사들을 초대해가지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갔어. 참전용사들이 와가지고. “이거 누가 불렀지?” 내가 물어서 들은 일은 있어.

지용길 사무국장-그게 새에덴교회 소강석목사님이 하신 거에요.

지갑종 회장-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신세진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고. 지금은 내가 그 아이디어를 줘가지고 참전용사들이 들어오면 56일을 하도록 되어있는데.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논두렁에서 참배할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러게요. 그것을 다 만드셨네요. 회장님 재산까지 드려가지고.

지갑종 회장-그래서 그것을 79년 박대통령하고 얘기한 다음에 나머지 나라 것을 74년까지 다 끝냈어.

지용길 사무국장-다른 나라들도요.

지갑종 회장-그리고 6.25 25주년이 돼. 75년은. 그래서 정부가 참전용사들을 유치한 거야. 오는데 참전용사가 가서 참배할 장소가 있어야 하니까? 기념비를 격전지에 만들어야 하는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제대로 몰라. 어디가 전투가 제일 심했는지.

지용길 사무국장-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는데요?

지갑종 회장-한쪽에서는 에머럴드고지라 하고 한 쪽에서는 다이아몬드고지라고하고 서로 나라마다 다르다고. 자기네 나라에서 인정하는 위치에 기념비를 해 놓아야 하거든.

지용길 사무국장-위치가 서로 다르니까요.

지갑종 회장-마침 70년이 들어서면서 고속도로가 생기더란 말이야? 그래서 고속도로 곁에 좋은 장소를 정해서 만들었어. 그래서 매년 헌화하게 되고 지금도 헌화하러 그 기념비 있는 데를 방문해서 행사를 해.

지용길 사무국장-교통이 편해야 하니까요.

지갑종 회장-금년에도 6,25 70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국문제야. 유엔 참전국 입장에서는 아직 70년이 아직 안 됐어.

지용길 사무국장-참전국 입장에서는 그렇네요.

지갑종 회장-뭘 자꾸 남의 생일을 앞당겨서 할려고. 한국은 한국대로 하고 다른 나라는 그 사람들이 도착한 날짜가 70년이 되는 날에 그 때 그 때 한다.

지용길 사무국장-더 의미가 있겠어요.

지갑종 회장-예를 들어 2사단은 82일에 부산에 올라왔단 말이야. 그래서 부산에서 부두에서 행사를 하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러게요. 뜻 깊은 현장이니까.

지갑종 회장-현장에서 사단장 이하 의장대가 다 서서 70년 전 우리가 올라왔던 부두라고. 그렇게 해서 행사를 해야지. 정부 예산이 있으니까 가지고 가서 그 나라에서 밥 사주고 참전용사 만났다는데. 참전용사가 어떤 놈 인지 아나. 가짜도 많고. 그런데 가짜가 더 선전은 잘 해.

지용길 사무국장-맞습니다.

지갑종 회장-나는 그런 내용을 많이 알어. 알지만 나 혼자는 힘이 안 돼. 또 내가 낀다 해도 예산이 마음대로 집행이 안 돼. 공무원이라는 것 때문에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행사를 하려는 거야. 그래 신문에 제대로 홍보도 안 되고.

지용길 사무국장-그러네요. 안타깝네요.

지갑종 회장-지금 목사가 한다는 것도 과거에 한 번 한 일이 있어. 정부차원에서. 한국의 군목출신들이 초청해달라고 했어. 미국의 군목들을 초청한 거야. 참전용사가 아니라 참전용사 겸 군목. 그래야 서로 말이 맞는 거니까.

지용길 사무국장-그렇군요. 회장님! 종군기자로서 6,25를 종군기자로 활동하셨는데 아까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말씀 해 주셨고요. 이제는 회장님께서 한국전쟁을 보시고 느낀 느낌을 말씀해 주시지요.

지갑종 회장-6.25가 않 났으면 한국이 어디인지 몰라. 전 세계가. 그래서 나쁘게만 생각지 말고.

지용길 사무국장-어차피 역사니까?

지갑종 회장-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6.256.25. 6.25를 기해서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고.

지용길 사무국장-그런 면들이 있네요.

지갑종 회장-또 우리가 참전용사들을 고맙다고 함으로 한국은 예의가 있고 민족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다.

지용길 사무국장-. 배운망덕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공을...

지갑종 회장-그래서 뭔고 하니. 2차대전 때 미국이 구라파에서 많이 죽고 구해줬는데도 그 나라는 참전용사들을 초대하는 일이 없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런 역사가 있었네요.

그런데 한국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거지나라가 어떻게 돈 몇 푼 벌었다고 초청을 해서 안내도 하고 그런다는 거야. 이제 그리고 참전용사들이 한국에 와서. 1차 팀이야.

지용길 사무국장-동방예의지국이니 보은의 마음을 표시한거네요.

지갑종 회장-75년도 제 1차 팀이 왔는데. 그 호텔에서 문에 서 있는 도어맨에게 참전용사가 팁을 주었어. 팁을 주니까 안 받고 NO했어. 아니 이것 팁이라고 하니까 게가 한 얘기가 you saved our country.라고 했어.

지용길 사무국장-~ 우리나라를 구해줬는데 내가 팁 받을게 아니다. ~

지갑종 회장-그 말이 또 청와대에 예방을 했어 참전용사들이. 초청을 해서. 내가 감탄했다.

지용길 사무국장-도어맨조차도

지갑종 회장-예를 들면 그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불란서는 그래도 문명국가인데도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왔다는 거야. 프랑스는 한국에 올 때 외인부대조직으로 왔는데. 11월 말에 도착 했어 한국에. 6월 달에 전쟁이 났지만 11월 말 추운 겨울에 왔는데 덜덜 떨면서 왔어. ? 한국이 자기들 식민지 월남 옆에 있는 줄 알고 반 팔 입고 왔다가 혼이 난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하하하

지갑종 회장-그래서 나는 그런 것도 몰랐는데. 배에서 이미 미군 복으로 갈아입었으니까.

지용길 사무국장-그렇겠네요.

지갑종 회장-미국 장군하나가 그래. 그 때 혼났다고 추워가지고. 기자들은 그런 걸 본적이 없으니까 반바지를. 그래서 내가 그 반바지 하나 구했으면 좋겠다 했지. 반바지가 우리나라 시장에도 많지만 불란서 제를 보고 싶다는 거였지.

지용길 사무국장-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것도 당시 상황이니까요.

지갑종 회장-그 장군이 레온이란 장군인데 내 것 줄게. 그러면서 보내왔어. 그것이 지금 부산 유엔군 평화 기념관에 지금 전시되어 있어. 내가 텔레비전에 가지고 나가서 보여줬어. 바느질이 다르니까 불란서제다.

지용길 사무국장-아직도 남아 있네요.

지갑종 회장-군대얘기를 하면 6.25 당시에는 우리가 끌려갔단 말이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랬지요.

지갑종 회장-군대를 자진해서 간 사람은 그 전에 6.25 전에 배고파서 간 거야. 밥 먹으려고 간 국방경비대야 그것이. 직업군인은 몇 사람 안 되고 나중에 군대를 갔다 오면 취직이 잘되고 그런 건데,

지용길 사무국장-그런 역사가 있었네요.

지갑종 회장-결과적으로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를 지킨 호국용사들을 잊지 않고 그 분들을 도와야 한다.

지용길 사무국장-그 분들을 돕고 우대하고 그런 정책들을 펴야 한다는 거지요?

지갑종 회장-그래서 내가 정부에다 건의한 것이 있었어. 6.25날은 그 동네 반장을 통해서 자기 반 속에 6.25 참전용사가 있으면 그 집에 수박 한 덩이라도 가지고 동네 사람들끼리 같이 가서 고맙습니다. 얘기하면 좋겠다. 정부가 예산 들여서 다 할 수는 없어. 동네 반장이

지용길 사무국장-주민들이 알아주고

지갑종 회장-사람들이 전사자 가족이든 참전용사든 고맙습니다. 인사만 해도 그 사람들이 얼마나 보람을 느껴?

지용길 사무국장-회장님께서는 종군기자셨고 그런 경험들이 있으니까 아 이런 것을 해야겠다는 그런 것들이 보였던 것 같아요.

지갑종 회장-그러니까 나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계속 나와. 물론 못된 놈도 많아.

지용길 사무국장-그렇지요. 사람이니까

지갑종 회장-남이 고지 점령해 놓은 것은 이미 죽었으니까 자자기 했다고 훈장 타먹은 놈들도 있고. 세상은 다 만사가 이상하지만은 전체적으로는 국민들이 나라 지킨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용길 사무국장-맞습니다. 그래야 또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면 발 벗고 나서서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지요. 회장님! 지금가지 살아오시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지갑종 회장-지금까지는 물론 재정적으로 최근에 와서는 좀 어렵지만은 내가 한 일은 남보다도 보람을 느껴. 왜 남이 못한 것 알려줬고 했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고.

지용길 사무국장-,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세상이지만은 돈보다도 국가를 사랑하고 정말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오셨던 회장님의 생애였고 또 그것을 보람으로 기쁨으로 행복으로 느끼시니까 아름답습니다.

지갑종 회장-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국회에 있으면서도 국방위원을 했어. 그래서 국방부에다 그랬어. 병역 소집영장에 보면 며칠까지 출두 안하면 군법 몇 조에 의해 감옥에 간다고 써져있는 것이 있어, 그러서 그것을 삭제하라고 했어. 나라 지키러가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된다.

지용길 사무국장-끌려가는 것처럼.

지갑종 회장-설사 끌려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지용길 사무국장-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지갑종 회장-지금 내가 아직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낙동강전선 당시에는 길에서 막 잡아 갔어. 그렇게 전사한 사람도 많고. 또 그 시골 농촌 사람들 18, 9세 젊은 아이들을 막 결혼시켰어. ?

지용길 사무국장-군대를 안 보내려고?

지갑종 회장-군대를 가더라도 아이를 낳아 후손을, 씨를 말리지 않겠다는 시골 사람들의 마음. 씨를 말리지 않겠다. 그러고 결혼을 시켜놓고 갔는데 전사 했어. 그런데 어린애는 뱄단 말이야.

지용길 사무국장-다행이네요.

지갑종 회장-다행이지만은 게는 낳아서 6.25때부터 지금까지 70년 동안 아버지를 불러본 적이 없어. 그래서 아버지 기념비를 만들고 싶은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 아직 하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것들. 맞습니다!

지갑종 회장-그래가지고 홍보를 해서 6.25 유복자들 있으면 나오라. 이제 내가 예산이 생기면 군경 유족회 가서 당신들이 좀 알아봐 달라. 그리고 각 도지사들에게 그 유복자. 그런데 유복자들이 어디에 많으냐? 경상남북도하고 제주도에 제일 많아.

지용길 사무국장-, ~

지갑종 회장-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노인네 할머니 할아버지야. 70이나 80대니까. 그 사람들이 노인들이 몇 사람이 와서 기념비 앞에서 아버지라고 크게 소리 지르고 한을 풀면 그 곳은 눈물바다가 될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갑종 회장-그 얘기를 했더니 호주 참전용사 하나가 자기가 아는 사람도 유복자가 하나 있더라는 거야. 그 쪽에 호주에. 호주에서도 참전해서 못 돌아갔으니까. 이것이 나에게 남은 있는 숙제야.

지용길 사무국장-마지막 숙제가 남아있네요. 회장님 저도 기독교계통의 기사를 주로 쓰지만 일반적인 기사도 쓰거든요. 종군기자로 훌륭하고 멋지게 사셨는데 기자로서의 바른 방향이 있다면 저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지갑종 회장-기자는 정도를 그대로만 걸어가면 돼. 과장시킬 것도 없고. 그리고 기자라고 하니까 앞에서 더 자기 공적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심지어 월남전쟁 때는 기자라는 가짜가 카메라를 메고 오며는 윗사람부터 만나 보려고 애를 써. 그 이유는 윗사람들이 얘기하기를 자기가 참전용사라는 것을 내세우려고.

지용길 사무국장-자기도 참전용사다.

지갑종 회장-심지어 가짜기자는 카메라에 필름도 없는 것을 가지고 다녀. 필름이 비싸니까. 필름을 열어볼 수도 없고. 옛날에는 열어보면 사진이 날아가니까. 필름도 없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가짜기자도 있었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참 재미있는 일이었네요. 회장님 오늘 이렇게 오랜 시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재미있는 이야기 들으러 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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